artist statement
나는 폐기물 처리장의 버려진 사물들을 중심으로, 일상에서의 조각들과 정크 파일로 분류될 수 있는 웹 이미지 등 가치 하락된 대상들을 등치시켜 낯선 풍경으로 연출된 회화를 진행하고 있다, 이를 통해 현재의 상황에 매몰되어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는 스스로의 불안한 현재와, 관계의 생략을 부추기는 시대의 부조리함에 대해 고민한다.
부모님이 거주하는 폐기물 처리장은 개인의 안정과 불안이 공존하는 장소이다. 심리적 불편함이 여과없이 드러나는 개인적 공간에서, 나는 버려진 사물을 통해 시대를 관찰한다. 미디어는 폐기물 처리장의 형태와 유사하다. 그 안에서 끊임없이 배출되는 감각의 편린은 함축적이지만 사회는 인지적 욕망이 결여된 관계없는 관계일 경우에만 소통이 이루어지는 모순에 빠져 있다. 보려는 것과 보이고자 하는 욕망 사이에서 줄다리기 하는 과정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소통의 노력을 배재한다. 때문에 즉물적 욕망으로부터 배출된 대상들은 모두 관계없는 이방인이 된다.
판단이 보류된 버려진 사물은 스스로를 투영하는 회화적 매개이다. 이를 중심으로 화면 안에 등장하는 대상들을 다시점 상태에 머물 수 있도록 조율한다. 조율된 대상간의 관계적 의미를 헝클어 놓기 위한 방편으로 꼴라주의 형식을 빌려와 평면적으로 화면을 구성한다. 이를 통해 나의 작업이 소통의 인지적 과정이 결여된 현시대의 주의적 산만함과 조응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했다.
나는 회화적 시도를 통해 현실에서 직면하게 되는 불안과 갈등을 극복하는 존재로서 스스로의 발전을 추구한다. 나아가 예측 불가능성이 다분히 존재하는 동시대의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관계 맺으며 살아가야할지 끊임 없이 되뇌는 질문으로, 나의 작업이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critical writing
소비주의의 묵시록적 풍경, 또는
심리적으로 조정된 이미지 앗상블라주(image assemblage)
심상용(미술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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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출신 망명작가로 폴란드계 유태인이자 예술파괴로서의 예술을 하는 작가 구스타프 매츠거(Gustav Metzger)에 의하면, 지난 50년의 역사는 과거의 어느 때보다 더 야만의 시대였다. 이 기간 동안 (향후 특별한 변화가 없다면) 인류를 재앙으로 내몰 것이 분명한 다섯 가지의 문명 차원의 오류가 지속적으로 범해졌는데, 핵, 우주개발전쟁, 환경오염, 대량소비, 예술의 상업화가 그것이다. 핵과 경쟁적인 우주개발을 제외하면, 대량소비사회가 미래재앙의 요인으로서 차지하는 비중이 막대하다. 환경오염은 대량소비사회, 소비주의문화의 직접적인 산물이고, 예술의 상업화야 두말할 나위 없는 대량소비사회의 연장선상일 것이기에 그렇다. 메츠거에 의하면 삶에 불필요한 것들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작금의 세속 문명으로 인해 현재의 상황은 부켄발트보다 더 야만적이다. 현시대의 인류인 우리는 그것의 치명적 수준으로 인해 언제든 생명체들의 절대적인 말살이 가능한 정도에 이미 도달해 있다.
이 문명의 끔찍한 진실은 풍요를 가장하고 있는 것들, 막대한 양의 상품을 찍어내는 자동생산라인을 갖춘 거대한 생산시설과 그 라인들에서 쏟아져 나와 잠시 쇼핑몰의 질서정연한 전시품이 되었다가 이내 우리의 삶을 물건들에 깔려 질식사하기 직전의 것으로 만드는 것들의 순환에 있다. 이런 인식을 조금 연장하면 폐기되고 버려진 것들에 대한 전향적인 인식이 가능해진다. 용도 폐기되고 버려지고 방치된 것들의 잠정적 취합공간인 고물상은 대량 소비주의의 야만적 순환의 종점이다. 폐기물 처리장은 왜곡된 권력관계가 재구성되는 해방의 공간이다.
여기서 용도폐기 이전의 소위 ‘사물의 계급’과 그로 인한 갈등은 폐기되거나 적어도 현저하게 약화된다. 고가 상품과 싸구려, 고급백화점에 진열되었던 것과 재래시장을 전전하던 것, 명품브랜드 로고를 지닌 것과 그렇지 못한 것, 기능적으로 첨단이었던 것과 보편적이었던 것들 간의 위계는 폐기되어 마땅한 이데올로기로 재인식된다. 이 새로운 인식 안에서는 버려지는 것은 곧 축복이다. 구매, 곧 움켜쥐는 행위에 신경질적으로 작용하는 권력과 자본이 버리는 행위에는 개입하지 않거나 상대적으로 너그럽게 개입하기 때문이다. 19세기 프랑스의 문학비평가 알렉상드르 비네(Alexandre Vinet)가 “불가능한 일이 가장 좋은 진정제이다‘고 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폐기하고 버리는 것은 사물들을 그것들의 원래적인 상태인 입자, 더 나아가 파동 상태에 상대적으로나마 가까운 조건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이다. 폐기물 처리장의 되는대로 배치하고 쌓아놓는 방식은 미술관의 방식, 즉 사물들 간의 위장된 위계질서를 위장하거나 포장하는 세련된 디스플레이 방식에 대한 극단적 안티테제로, 더는 손댈 것이 없는 온전한 미적 봉기의 형식이다.
이런 맥락에서라면 폐기물 처리장이야말로 탈 제국주의적, 탈 자본주의적 대안 미술관의 한 유형으로서 나무랄 데가 없다. 제국주의적 위계와 온갖 정치적 속셈과 장삿속으로 얼룩져 있는 미술관들을 보시라! 현대미술관은 특히나 위선적이다. 매일 전위, 해방, 정의 민주제 같은 용어들의 축제가 벌어지는 그곳을 작동시키는 시스템, 선별하고, 디스플레이하고, 선전하고, 설득하는 전략과 기술은 그것이 속한 사회의 기득권 권력과 자본 지형의 정교한 재현일 뿐이다. 반면 고물상에서 고물들은 차별과 차등을 위한 알리바이인 소위 과학적 분류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들은 신분제 사회가 필연적으로 배증하는 긴장이나 불안, 상실도 없다. 권력과 헤게모니를 진 기득권 대량소비문화로선 심각한 위반으로, 최대한의 경멸과 모독에 처해야 마땅한 적대적 공간인 것이다. 이것이 김동진이 거꾸로, 비딱하게 읽어야 할 텍스트로서 폐기물처리장 풍경을 추천하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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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라우센버그가 처음 뉴욕을 방문했을 때 그가 받았던 첫 인상은 엄청난 양의 쓰레기에 관한 것이었고, 이는 그가 앗상블라주(assemblage)의 미학에 다가서는 단초가 되었다. 김동진의 고물상 풍경도 라우센버그의 네오다다적 감성과 그로부터 도래한 무작위적 풍경화 방식인 앗상블라주와 맥락을 공유한다. 이밖에도 폐기되고 방치된 것들의 다다적 정서는 전후 유럽의 누보 레알리즘의 전망, 예컨대 아르망의 부숴진 타자기나 바이올린, 세자르의 폐차 조각, 다니엘 스푀리의 ‘포획된 사물’에도 맥이 닿아 있다.
김동진의 회화가 이렇듯 버려진 사물들의 풍경화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탈 제국적인 것들의 무더기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면 물건들이 마냥 무질서하게 놓여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최근 그것들의 위치와 배치에는 심리극이나 상황극의 전략이 훨씬 더 많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그 누구도 널 돌봐주지 않아>(2019)나 <잃는다는 건 새로운 어떤 것을 위해 자리를 내어주는 것>(2019) 같은 제목이 말해주듯, 그 서사에는 김동진의 자전적 고백, 그가 겪어야 했던 불안과 억압의 경험이 녹아있다. 그는 말한다.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나의 모습에 실망하는 나날이 계속된다. … 이겨내고 싶은데 이겨낼 힘이 남아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이런 심경으로 보아 <용기 없는 자의 변명>(2019)에서 유혈이 낭자한 채 길바닥에 쓰려져있는 희생자는 작가 자신의 분신임이 거의 분명하다. 그는 권총에서 발사된 탄알에 의해 치명상을 입은 채 쓰러져 있다. 이미 사망에 이르렀을 수도 있다. 우발적인 사고거나 주도면밀한 범죄일 수도 있다. 권총을 겨누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선정적인 빨간색 반팔 상의를 걸친 여인이 범인임에 틀림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얼굴 없는 그녀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는 근거는 아무 것도 없다.
이렇듯 폐기되고 버려진 사물들의 더미는 매순간 사건이 터지고 낯선 상황들이 발생하는 심리극의 무대가 된다. 김동진의 시각적 스토리텔링에는 이제 불길한 폭발사건이 일어나고 디젤기관차가 등장한다. 심리극의 무대는 확장되었지만 여전히 탈 위계의 공간이고, “왜곡된 인간의 심리와 불균형하고 불완전한 감각, 소멸될 것 같은 우울감”이 그 행간들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김동진의 회화는 복잡한 심리극의 양상을 띠고 있고, 이로 인해 이미지 앗상블라주는 무작위성과 비상징성을 미학적 특성으로 하는 지난 20세기의 ‘전위적 앗상블라주’와는 구분되는, 이를테면 심리극적으로 조율된 앗상블라주의 성격을 띠고 있다. 김동진의 회화에 등장하는 어떤 것도 전적으로 무작위적이거나 비상징적이지 않다. 폐기물 처리장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검정색 개는 김동진과 우리 모두의 내면의 어두운 쪽을 관리하는 우울감의 상징이다. 김동진의 폐기물 처리장과 그 안의 버려지고 방치된 사물들을 통해 사물을 이상화하는 제도적 방편으로서의 미술관에선 접하기 어려운 사유와 마주하게 된다.
article
월간 퍼블릭 아트 2019년 4월호
파국은 새로운 가능성을 담보하는가? <불규칙한 규칙>전 3.4-3.29 갤러리AG
정강산 독립연구자
갤러리 AG에서 열린 개인전 <불규칙한 규칙>에서 김동진은 폐기처분된 고물들과 쓰레기, 동물, 마네킹처럼 신체의 부분들이 절단된 인물의 모습을 조합하여 구성한 회화 작업들을 제시했다. 그가 쓰레기더미와 정체불명의 인물들에 집중하는 경향은 <과잉실재>(국민 아트갤러리, 2016)에서 시작되었는데, 여기서도 그는 무언가 파괴되어 남은 잔해들과 인간을 병치시켜 우울한 심상의 풍경들을 묘사한 바 있다. 한편 본 전시의 작업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캔버스 내부의 시점들이 뚜렷이 다변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다리가 하나 꺾인 의자를 묘사한 <잃는다는 건 새로운 어떤 것을 위해 자리를 내어주는 것> (2019), 버려진 리어카와 전선 드럼을 그린 <방치된 가능성 연작>(2019) 등 단일 오브제를 그린 것들을 제외하면, 그의 작업에서 사물들은 하나의 시점 속에 통합되어 있지 않다. <왜곡된 순간과 너와 나의 이야기>(2019)에서 전면에 그려진 두 명의 인물은 마치 배경과 완전히 분리된 것처럼 놓여있으며, <PASSIVE DESTRUCTION>(2018), <용기 없는 자의 변명>(2019), <순간의 방치와 가중된 무게의 인과관계>(2019)에 나타나는 - 인간, 쓰레기, 동물 등의 - 대상들은 한 공간을 점유한 것처럼 놓여있으나 서로 어떤 연관도 없는 듯한 시점들 속에 배치됐다.
다시점적 투사 속에서 각기 상이한 소실점을 지닌 오브제의 연쇄가 만드는 풍경은 결국 내적으로 융화되는 데에 실패한다. 그래서 그가 구성하는 최종적인 이미지들은 조화로운 상태와 거리가 먼데, 그가 그것을 의도했든 그러지 않았든 이는 동시대적 지각의 디폴트로서 주의 산만함(distraction)과 조응하며, 단일한 주체의 시선을 전제하지 않는 시점의 불안정성과 조응하는 구도로서 징후적이다. 말하자면 김동진의 작업은 파편적이고 부분적이다. 따라서 어떤 대상이 전체와 관계 맺는 방식을 파악하지 못하는 오늘날의 시각성을 체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지적 히스테리 상태에 처한 주체의 시점을 증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점에서 그가 끈질기게 주목의 대상으로 삼고자 했던 ‘버려진 것’, ‘쓸모없어진 것’, ‘판매 될 수 없는 것’은 오늘날 인간이 체험하는 실존적 감각에 대한 유비로서 작동한다. 사회적 자유가 제거된 상태에서 남게 되는 동물적 신체에 대한 감각은 작가의 시선을 거쳐 음울하고 불안한 폐기물 더미의 모습으로 외화되었다. 파국의 심상들에 침잠하면서, 또 파국의 이미지를 탐닉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진실은 깔끔하게 표백된 도시와 세련된 백화점의 풍경 속에 있지 않아요. 외려 오늘날의 총체적인 풍경은 쓰레기 더미에서나 찾을 수 있을 겁니다.”그런 점에서 김동진의 제스쳐는 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의 풍경을 체념적 냉소 속에서 묵시록적 파국의 모습으로 조명하고자 했던 1920년대 독일의 신즉물주의자들과 겹쳐있다. 양자 간에 차이가 있다면, 과거의 그 냉소적인 사조는 뚜렷이 인지 가능한 전후의 쇠락과 퇴폐적인 풍경들에 기대고 있지만, 김동진은 인지 불가능한 상태로 나아가는 세계화 이후 자본주의의 조건에서 주체의 인지적 불구상태에 기대고 있다는 점뿐이다. 혹은, ‘잃는다는 건 새로운 어떤 것을 위해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 그는 이러한 심상들로부터 새로운 시작을 보고자 안간힘을 쓴다는 점에서 과거의 염세주의적 예술 조류들로부터 미세하게 구별될 따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쓰레기 더미와 폐허가 된 공간의 잔해들, 뒤틀리고 절단된 신체들이 오늘날의 진실한 풍경에 가까울 것이며, 이들은 절망적이지만 새로운 가능성의 계기라는 그의 진단은 실제로 절반의 진리를 담고 있다. 새로운 가능성은 파국 속에만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의 절반은 틀렸을지도 모른다. 외려 우리는 거대 은행과 독점 기업에 대한 민주적이고 사회적인 전유의 가능성을 역설하며, 파국이 아니라 기존의 생산양식 내부에서부터 변화의 가능성을 찾고자 했던 한 철학자의 주장을 복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 파국 이후 남겨지는 것은 당연하게도 어떤 가능성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이 새로운 무언가일지, 과거로의 회귀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